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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한 청년이 "늙고, 지혜롭다"라는 말로 운을 떼며 내게 편지를 보내 왔다.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라고 그는 적고 있었다. "당신이 늙고, 지혜로우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난 마침 여유가 좀 있었던 터라 다른 수백 통의 편지와 비슷했던 그것을 집어들었었다. 전체적인 내용을 훑은 것이 아니라 대충 보다가 눈에 들어오는 몇 개의 단어를 보며 그 단어의 속뜻을 곰곰이 가능해 보았다. 분명히 '늙고, 지혜롭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은 활동 폭도 좁고 재미있는 일도 별로 없는 지금, 보다 할 일이 풍성했던 활기 찬 시절에 지혜를 아주 가까이에서 접해 보았다고 생각하는, 지치고 피곤한 노인으로 하여금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내가 늙은 것은 사실이다. 늙고 쇠잔해지고 실망하고 지쳐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늙음'이라는 단어가 전혀 다른 표현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고어, 오래된 집과 도시, 늙은 나무, 유서 깊은 모임, 옛 풍습에 대해서 말할 때의 '늙음'이라는 의미는 가치 없거나 가소롭다거나 경멸의 뜻을 담고 있지 않다.

사실 나도 노인의 질을 나 자신에게 있어서 단지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대개 그 단어의 많은 뜻 가운데 부정적인 측면만 인정하고 내게 맞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편지를 쓴 젊은이에게는 '늙음'이라는 말이 하얀 수염이 나고, 잔잔한 미소를 띠고, 약간 감동적이고, 약간 존경스러운, 회화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은 나 자신이 아직 늙지 않았을 때 '늙음'에 대해 가졌던 생각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단어를 그런 대로 옳은 것으로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편지의 서두로서는 제법 그럴 듯하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혜롭다'라니! 도대체 그것이 무슨 뜻이란 말인가? 그냥 아무런 의미가 없고, 별다른 뜻 없이 무심히 쓰이는 형용사였다면 차라리 쓰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분명한 뜻이 있었다면, 그 안에 무슨 뜻이 감추어져 있었을까?

난 늘 해 왔던 방법대로 그 단어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것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후 방을 왔다갔다하다가 '지혜롭다'라는 말을 혼자말로 다시 내뱉어 본 다음 뇌리에 제일 먼저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지 궁금해 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정작 전혀 엉뚱하게도 소크라테스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냥 아무런 뜻도 없는 말이 아니라 명칭이 있고, 그 이름 뒤에 어떠 추상적인 것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한 하나의 인물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재적인 인물의 이름인 소크라테스와 묘연한 의미의 지혜가 무슨 관계란 말인가?

따지고 보면 그것은 쉬웠다. 지혜는 학교 선생님이, 강당 가득 메운 청중 앞의 연설자가, 비평가나 잡문가가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말할 때면 언제나 아무 거리낌없이 언급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혜로운 소크라테스 - 소크라테스의 지혜 - 혹은 연설자의 표현대로라면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지혜. 그런 지혜에 대해서라면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 구절을 듣자마자 현실이, 진실이, 많은 전설적인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강한 힘을 갖고, 확신에 찬 인물이었던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볼품없이 얼굴이 일그러진 아테네의 늙은이였던 그는 자기 자신의 지혜에 대해 모호하게 말했었다. 그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지혜라는 단어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지 언급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해졌고, 그것으로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렇게 해서 나는 지혜롭지 않았던 늙은 소크라테스 앞에 지혜로운 늙은이가 되어 서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스스로 거부감이 들어 부끄러웠다. 내가 그렇게 부끄러워할 이유는 얼마든지 많았다. 술책을 부리려거나 까다롭게 굴려는 것이 아니다. 나를 두고 지혜로운 사람이라 말했던 그 젊은이는 그 자신의 어리석음과 젊음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교훈과 연륜에 따른 지혜가 스며 있는, 경험과 사고가 깃들어 있는 나의 많은 시구를 통해 그 사람으로 인해 그렇게 생각하도록 한 것이다. 그것들이 그를 그렇게 하도록 유인했고, 그렇게 할 근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나 역시 내 생각으로도 시로 표현했던 '지혜'의 대부분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의구심을 품어 보기도 했고 심지어 취소하거나 부인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부정을 했던 것보다는 평생 동안 더 많이 긍정했었고, 투쟁을 하기보다는 침묵을 지켜 왔다. 또한 좀 더 많이 동의해 왔고, 종종 연혼과 믿음과 언어와 관습의 전통에 경의를 표해 왔었다.

사실 나는 글 속에 묵시록적인 종말이 위협적인 인습적 제단의 화상에 드리운 장막과, 구름이 뇌우가 휘몰아치기 전 균열이 생기면서 사이가 벌어지듯, 인간의 가장 안전한 보금자리가 빈곤이고, 인간의 진정한 식량이 허기라는 것을 의미하는 문구를 간간이 적어 놓곤 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종합해 생각해 보면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도 정형화된 세상과 전통에 눈길을 돌리고 싶어했다. 끔찍스럽게 아름답거나 축복스럽거나 치명적인 순간이 말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에 말이 더 이상 아무 소용이 없고, 포기되는 경험 속에서 마술적인 언어의 유희와 위안과 소나타, 푸가, 묵시록적인 불길 속의 심포니를 선호했었다.

내게 편지를 보낸 그 청년이 내 안에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교수나 잡문가의 의미에서 지혜로운 사람을 발견했다면 내가 그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를 충분히 마련해 준 셈이었다.......

'늙고, 지혜롭다'라는 문장에 대한 의미 파악을 위한 노력이 내게 남겨 준 것은 거의 없었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편지를 이해해 보고 싶어서 오히려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단어 하나 하나에 신경을 쓰지 않고, 젊은이가 편지에 쓰고 싶어했던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로 했다. 편지를 쓴 이유는 겉으로 보기에 아주 간단해 보이는 것이었으므로 대답도 쉬울 수 있었다. "삶이 의미가 있다면 차라리 머리에 총알을 박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언뜻 보기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별로 많아 보이지 않았다. 가령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닐세, 젊은이. 삶은 의미가 없네. 그러니까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해 보는 편이 더 낫겠지." 혹은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었다. "삶은 물론 의미가 있기 때문에 권총으로 도망치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지."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비록 인생이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자살을 할 필요는 없지." 혹은 이렇게. "삶은 그것 나름대로 좋은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뜻을 따르거나 머리에 총을 쏘는 것보다 더 나은 행동을 통해 그 의미를 알아내는 것도 아주 어렵네."

그런 것들이 언뜻 보기에는 젊은이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답이었을 것 같다. 그렇지만 혹시 또 다른 것은 없는지 생각해 보니 네 개나 여덟 개가 아니라 수백, 수천개의 답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 편지와 그것을 쓴 사람에게는 사실상 오직 하나, 자유로 향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해결책만이 그를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대답이라고 혹자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의 대답을 찾는 데 지혜와 나이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편지의 질문은 나를 캄캄한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지혜, 혹은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과 경험이 풍부한 상담자들이 알고 있는 지혜는 책이나 설교, 연설에 훌륭하게 잘 인용될 수는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다가선 이런 사람, 나이와 지혜를 과대평가하기는 하지만 대단히 심각하고 '당신을 신뢰한다'는 간단한 말로 모든 무기와 술책을 내게서 빼앗아 간 정직한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유아적이면서도 심각한 질문이 적혀 있는 편지에 대한 답을 어떻게 할 것인가?

편지를 읽으면서 이해력보다는 느낌을 통해, 경험이나 지혜보다는 위나 교감 신경을 통해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섬광 같은 뭔가가 번쩍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진실 같은 것, 뇌우가 몰아치기 전 구름 사이로 틈이 벌어지면서 번쩍하는 번개 같은 것, 관습과 평안의 저편, 그 너머에서 부르는 소리 같은 것이었다. 그것에 대해 스스로 몸을 낮추거나, 침묵하는 것 혹은 그 부름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순종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쩌면 내게 아직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아는 것이 거의 없어서 그 딱한 젊은이를 도와줄 수 없으니 그 편지를 다른 많은 편지들 제일 밑으로 집어넣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그 밑에 들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기억하다가 차츰 완전히 잊혀지도록 그렇게 사라져 버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난 여전히 그것을 잊을 수 없었다. 실제로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해야만 비로소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은 경험이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진실과의 만남, 부르는 소리의 힘에서 나왔다.

내가 답을 퍼 올릴 수 있는 그 힘은 더 이상 나 자신이나 경험이나 영특함이나 연습이나 박애주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지가 내게 안겨 준 진실 자체, 그 작은 진실 조각 하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편지에 대한 답변을 하게 만드는 힘은 그 편지 속에 들어 있으므로 젊은이가 스스로 대답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늙고, 지혜로운 돌처럼 굳은 내게 불꽃을 튀게 했다면, 그것은 불꽃을 일게 만든 그의 망치이고 그의 일격이고 그의 괴로움이며, 그의 힘일 뿐이다.

그동안 그런 종류의 질문이 적힌 편지를 수없이 많이 받았고 또 그에 답변했었다. 또 때로 답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다. 다만 괴로움의 정도가 항상 같지는 않았고, 불쑥 그런 질문이 강렬하고, 순수한 영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어서, 심하지 않은 고통과 심하지 않은 체념으로 제법 여유가 있던 젊은이들도 있었다. 혹은 내 결정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그래'라고 하면 곧 구원이 되고, 내가 '안 돼'라고 하면 죽겠다는 말이었다. 비록 비장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나는 그것이 나의 나약한 면에, 나의 허영심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은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안 된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죽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문제를 계속 키워 나가면서 늙고, 지혜로운 많은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들이 들려주는 대답에 가끔은 위로 받기도 할 것이다. 가끔은 흥미로워하면서 그것들을 차곡차곡 모아 둘 것이다.

만약 오늘 내가 그 편지를 쓴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닐거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심정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그의 신뢰에 대한 화답으로 그를 도울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면, 그것은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을 통해서, 내게 손을 뻗었던 그의 힘, 나의 인습적인 연륜의 지혜를 뚫고 지나가는 그의 진실, 나를 순수로 강요하는 그의 순수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어떤 덕망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박애주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긴 한숨을 내쉬고 나면 어떤 세계관을 갖고 있든지 간에 다시 숨을 들이켜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일부러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아도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만약 내가 뇌우가 휘몰아치기 전에 섬광이 번득이듯 진정한 삶을 환하게 느끼고 흥분한 채, 답답하기는 하지만 서둘러 무슨 일이든 해야만 한다면, 나는 이 편지로 더 이상 고민하거나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 또한 의미 파악을 위한 일체의 노력이나 판단을 할 필요도 없다. 유일하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부르짖음을 따라 내 충고나 내 지식을 들려 주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기 스스로 불평한, 그 자신에게 있는 괴로움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대답이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그 젊은이가 이미 갖고 있는 그 대답을 나는 그에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편지를 쓰는 사람이 아무리 절박하고, 급박한 어려움에 처해 있더라도 관습적인 기호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미지의 사람이 하는 질문이 편지가 되어 수신자에게 전달되기까지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

그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라고 물었었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느라 심한 몸살을 앓는 것처럼 모호하고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일반적인 삶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철학이나 교리나 인권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직 유일한 자기 자신의 삶이었다. 이른바 나의 지혜로부터 어떤 교훈을 듣자든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지침을 듣자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것이 아니라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으로부터 잠시 주목을 받고, 그것으로서 이번의 난관을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내가 만약 그에게 그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를 도운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잠시 동안이나마 내게서 늙음과 지혜로움의 옷을 벗겨 내고,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엄연한 진실을 접하게 한 그의 괴로운 처지였다.

관습의 저편에서 부르는 외침
<비밀> 중에서(1947)
헤르만 헤세 "아름다운 죽음에 관한 사색" 중

Mit der Reife wird man immer j"unger
by Hermann He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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