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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구백칠십사년 십이월 오일 십사시 사십구분

별 뜻 없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런지도 벌써 이십이년이 조금 넘었다. 그동안 몇몇의 낯익은 얼굴들을 묻기도 하고 아직 잊지 못해 가끔씩 생각해 내기도 한다.

아버지. 난 왜 바보같이 당신에게서 받은 것들과 당신에게 준 것들을 생각하려고만 하는 걸까요? 때늦은 후회같은 것이기도 한데... 그래. 어쩌면 이런 것들이 정말 하지않은 것들에 대한 후회가 아닐까? 저질러 버린 일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건데... 망설이다 놓쳐버린 시간들이 너무 많다. 늘 마음 속으로만 생각해 오던 것들, 난 그런 것들을 결국에는 당신과 함께 묻어 버렸습니다. 돌이키는 것, 후회하는 것 뭐 그런 잡다한 사념(思念)들은 당신의 생전에도 했었는데... 철이 없었는지 아니면 당신의 잘못인지...

눈물이 날 만큼이나 내 마음 속에 들어오진 못한 아버지였는데, 왜 지금 울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스무해의 아쉬움 같은 걸까? 아니면 그 이상의 것일까? 아직도 뭐라 말할 수 없는 건 자신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도 나름대로 확신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 이유에서겠지. 어느새 게을러진 나를 보는 나는 아직도 당신에게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단 한마디의 말씀도 없으셨던 것. 유언? '잘 살아라. 엄마 잘 모시고...' 차라리 이런 흔해빠진 말씀이라도 던지셨다면, 무책임한 당신의 마지막 매마른 모습을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흔들리진 않을텐데...

하지만, 이런 글을 쓰는 저 자신도 이젠 그런 당신을 차츰 잊어 가고 있습니다. 그저 가끔씩 술에 취해 무슨 일인지 그냥 그리울 때면, 몇마디 던지곤 합니다. 아버지, 당신의 추했던 모습들, 자랑스러웠던 모습들, 슬퍼하던 모습들, 아파하던 모습들을 잊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그런 것들이 제 생활의 일부분을 갉아 먹지 않았으면 할 따름입니다. 문득 느끼는 사실들이 저를 놀라게 합니다. 저의 인생이 왜 당신께서 말씀하신 당신의 인생을 그리도 닮아 가고 있는지... 대단하지도 않은 당신의 삶, 아니 차라리 비참하기까지 한 당신의 삶을 왜 저에게 떠맡기시는지 원망스럽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당신의 죽음부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직도 전 당신의 아들이 아닌 듯 합니다.

술에 적당히 취해서는
술주정 19970310
일천구백구십칠년 삼월 십일
새벽 한시 십일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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