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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달밤은 호숫가에서 보낼 일이다.

빈 배에 누워 흔들릴 일이다.

연인이 아니라도 우수의 아랫도리처럼 흔들리던 비파(琵琶)의 꽃댕기, 그 회오의 메아리와 같이 노닐 일이다.

시원의 살무사 한 마리 원시림 속에서 빠끔히 미소지을 일이다. 그래서 나는 달밤을 사후(死後)의 림보(limbo)라고 푼다. 끝없이 쓸쓸하고 고요하며 적막할 테니까.

달밤은 꿈길에서 마주친 여인의 무덤처럼 고즈넉하다. 사방을 달려도 낯 익은 이름 한 점 거칠 것이 없는 공허, 그 영원으로 내달은 애틋한 눈시울, 그렇듯 언제나 달밤의 호젓함을 그리며 살아가고 싶다.

역사가 밤 깊은 음모로 지새고 세속이 이기의 태엽으로 밤길을 메울지라도, 나는 시선(詩仙) 이태백처럼 달그림자를 낚으며 늘 빈 망태기 속으로 흔들리며 살고 싶다.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도 나는 달밤과 더불어 영원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

달밤은 회오의 빈 몸으로 맞을 일이다.

황혼의 누란(樓欄)에서 흔들릴 일이다.

강변의 으스름, 열사(熱砂)의 꿈에 젖은 산호초, 그 긴 인고의 바람\으로 달밤을 덮고 나는 차라리 밤새 흐느끼듯 뒤척이리라. 그래서 나는 달밤을 수난의 스승으로 푼다.

성찰의 과녁을 속삭이면서 은은히 우리의 마음을 울먹이듯 비쳐주는 달빛, 너는 저승에서 마주친 인간사, 먼 구름 그 표표한 인적의 거리 위에 다시 성서의 사면(赦免) 같은 어둠으로 내리면 우리는 또 한 번 너를 기억하게 되리라.

그래, 달밤은 회한의 정지된 함성이다. 야광의 무지개, 시원의 이력으로 채색된 바람, 정감의 은빛 나래다. 차라리 어쩌면 난세(亂世)의 고뿔 같은.


II


내가 군에 있었을 때, 그날도 분명 달밤이었다. 친구와 같이 강물 깊이 던져진 소녀를 건져낸 일이.

"자살한 사람은 모두 지옥에 갇히는 거라."

16세 어린 소녀는 젖은 몸을 이끌고 달빛 속으로 사라졌으니 그때 그 월광의 외로운 흔적은, 지금 어느 하늘 아래 새똥만큼 묻어 있는가. 달빛 아래서 죽고 싶었다고 속삭이던 그 깜장입술의 소녀는, 또 어느 달밤에 삭발을 했다고 하지 않던가.

소녀는 어느날 달밤의 긴 여운을 삭이기가 제일 원통했다고 웃으면서, 부처님의 자비가 달빛처럼 온 누리에 내리기를 빌어 왔으니, 소녀의 가사(袈裟) 위에 묻어 둔 그 날의 달빛이 지금도 쬐꼼은 깜빡거리고 있으리라. 그래서 달밤은 어쩌면 조화의 음덕쯤 될까.

그래, 달밤은 강보에 싸인 넋이다. 밤을 태우는 하늘빛 꽃이다.


III


월구(月球), 월(月), 태음(太陰), 노담(老擔) 등 그의 숱한 이름만큼이나 많은 우리네 생활의 애환들, 그 월력(月曆)의 긴 뇌성과 더불어 뭇시가의 대목으로 반만년 이 나라의 한을 쓰다듬어 온 쌍두 마차, 그 자전의 조곡(粗曲)쯤 될 게다.

달하 높이곰 돋으사, 이태백이 놀던 달, 이화에 월백하고, 베에토벤의 월광곡까지 동서가 모두 그렇듯이.

그러나 달은 이제 신비의 계수나무 껍질을 벗긴 상혼의 토끼 화상 같은 것, 하지만 오한의 붕대는 차라리 풀어 주어라.

이제껏 산고(産苦)의 성찬같이 뭇사람들의 이기적 구미에 조롱받던 달이라면, 월색의 그 빈 월랑(月廊)은 누구라 서성일 것인가.

월야(月夜)의 서러운 언약을 누구와 더불어 다독거릴 것인가. 하지만 달밤은 아무래도 여독과 더불어 잠길 일이다.

인연의 장도(長途)를 돌아볼 일이다. 그래서 남녀의 인연을 맺어준다던 월하노인(月下老人), 인연의 두루마리는 필경 월하(月下)라고 믿어 두어라.

수필가 정목일 선생이 그의 수필 '달빛 고요'에서 달빛은 몇 만년의 그리움을 풀어 엮는 노래요,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신비, 영혼을 맑게 해 주는 그리움이라고 썼던 것처럼.

시인 박화목 선생은 또 그의 시 '달무리 밤'에서

<전략>
대체 내가 무엇을 하다가
인생의 문턱으로 다시 쫓기어
돌아오고 있는지......
모르는 나 자신을 나는 보았습니다.


라고 읊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진정 달밤은 시심의 합창, 그 성찰의 여운쯤 되리라.

저 달빛 아래 그때 그 소녀의 외로운 꿈길이 영원을 파닥이듯이.

달밤
하길남 수필집 "그리운 이름으로"
상념의 뒤안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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